[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며칠 전까지 버스 정류장 가까이서 당당하게 그늘막을 제공하던 가로수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이리도 깔끔하게(?)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다니…어안이 벙벙합니다”
삭막한 회색 도시에 색을 더해주는 가로수.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 가로수의 존재감을 잊기 쉽다. 서울 동작구에 거주하는 한 시민은 멀쩡했던 가로수가 하루아침에 밑동만 남아있는 걸 보고 빈 자리를 느끼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가로수들의 안부가 궁금해진 시민 80여 명이 모여 지난 4월부터 두달 여간 서울 시내 곳곳의 가로수를 조사했다. 이 동네에는 어떤 종류의 나무가 몇 그루나 있는지, 나무의 키와 둘레는 얼마나 되는지, 훼손된 부분은 없는지 일일이 관찰하고 기록했다.
서울환경연합과 가로수시민연대는 지난 15일 서울 시내 가로수 1011그루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강남구 신사동의 가로수길(667m·125그루), 노원구 덕릉·동일·월계로(2.76㎞·466그루), 서대문구 성산·연세로(1.1㎞·251그루), 종로구의 효자로(771m·169그루) 등의 나무들을 대상으로 했다.
가로수들은 각자 식별할 수 있는 ‘수목 번호’를 갖고 있다. 이를 토대로 시민들은 가로수별로 나무의 종류와 둘레, 높이, 수관(잎과 가지가 달린 부분)의 폭 등을 기록했다. 정량적인 수치뿐 아니라 줄기와 가지가 양호한지 잘려나갔는지 썩거나 죽지는 않았는지 상태도 파악했다.
이처럼 세세하게 관찰하다 보니 동네별 가로수들의 특징도 나타났다.
종로구 효자로의 은행나무들의 키(중간값)은 15.5m에 이르는 반면 강남구 가로수길의 은행나무들의 키는 8.1m 정도로 절반 수준이었다.
노원구에는 5가지 종류의 가로수가 다양하게 분포해 있었다. 3개 도로(녹천교~당현3교, 노원역~중계근린공원, 우이천~월계주공1단지아파트)에는 은행나무, 양버즘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메타세퀘이아가 있었다.
반면 단일 수종으로만 된 길도 있었다. 신사동 가로수길은 모두 은행나무, 연세로는 왕벚나무로만 구성돼 있었다.
국립산림과학원은 시민들의 기록들을 분석해 가로수들의 경제적 가치를 추산했다.
키가 큰 가로수로 채워져 있던 종로구 효자로의 가로수들의 경제적 가치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1㏊당 약 265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가로수들이 지닌 대기오염물질 제거, 탄소 저장 및 흡수량, 홍수 저감 등의 효과만을 고려한 가격이다.
같은 공간에 땅을 사들이고 숲을 조성하는 데 드는 비용(대체 가격)까지 고려하면 종로구 효자로 가로수들의 가치는 3억133만원까지 치솟았다.
다양한 종류의 가로수가 있던 노원구는 ㏊당 경제적 가치가 218만원(4억 6643만원)로 추산됐다. 강남구 가로수길에 있는 가로수의 경제적 가치는 ㏊당 96만원(2억1989만원), 서대문구 성산로 및 연세로 가로수의 경제적 가치는 ㏊당 103만원(6967만원) 등이었다.
이처럼 가로수의 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함에도, 이들의 처지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간판이나 현수막 등을 가린다는 민원에 떠밀려 가지치기를 당하기 일쑤인 탓이다. 밑동을 통째로 잘리거나 가지와 잎을 모두 잃은 ‘닭발 나무’를 흔치 않게 만나게 되는 이유다.
박찬열 국립산림과학원 연구관은 ‘2023 가로수 시민조사단 결과공유회’에서 “도시 숲 조성의 시대는 끝났다고 본다. 기존에 100%를 가로수를 조성하는 데에 썼다면, 이제는 30%를 조성에 쓰고 70%를 유지·관리에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맞춰 도시 숲을 조성 및 관리하는 계획을 해마다 세우고 여기에 가로수를 포함하자는 취지의 법안이 지난 13일 발의됐다. 현행 법상 지방자치단체는 도시숲 조성 및 관리 계획을 10년 단위로 수립해 시행한다.
최영 서울환경연합 생태도시팀장도 결과 공유회에서 “행정에서 먼저 나서기 어렵다면 시민들이 기초데이터를 계속 쌓아나가는 접근이 필요하다”며 “이번 조사단 활동은 그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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