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고, 줄고, 사라지고
종이팩은 크게 주로 우유를 담는 살균팩(우유팩, Gable Top Carton)과 두유나 주스 등에 주로 쓰이는 멸균팩(Aseptic Carton)으로 나뉜다. 멸균팩은 안쪽 면에 은박지 등이 들어가 구별된다.
종이팩은 최고급 펄프 소재를 쓰는 고급 재활용품이다. LPB(Liquid Packing Board)를 활용하는데, 세계적으로도 미국이나 캐나다 등 일부 국가에서만 생산된다. 한국 역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재활용하면 고급 티슈, 페이퍼타올 등으로 만들 수 있다.
EPR(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 대상 재활용품 품목의 평균 재활용률은 78%(2019년 기준). 유리병은 64%, 페트병은 80%, 금속캔 89% 등이다. 이는 추가 생산량 대비 재활용 물량의 비중이니, 이상적으론 100%를 넘겨야 의미 있다(새로 생산한 페트병보다 재활용한 페트병이 많은 식).
종이팩 재활용률은 19%. 2020년엔 이마저 15.8%로 줄었다. 2013년 35%를 기록한 후 7년째 내리막이다. 판매량(출고량)은 늘어나는데, 재활용 실적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2013년 2만2000여t 수준이던 재활용 실적은 1만3000여t까지 감소했다. 종이팩 재활용은 세척하고 말려야 하는,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기껏 정성스레 준비해도 수거 시스템이 부재하다. 종이팩을 별도 수거하는 시스템이 없어 주민센터 등으로 직접 가져가야 하는 식이다. 사람들은 지친다. 지치니 수거량이 줄어든다. 수거량이 부족하니 재활용 업체도 버티기 힘들다. 이젠 수거해도 받아줄 업체가 없다. 악순환이다.
멸균팩 증가는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코로나 사태 이후 상온 유통이 가능한 멸균팩 수요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멸균팩도 종이팩의 일종이지만, 알루미늄박과 황색 펄프 등이 쓰인 탓에 일반 우유팩과 섞이면 재활용이 힘들다. 그러다보니 일선 현장에선 혼선이 잦다. “우유팩과 다르다”며 수거를 거부하는 식이다. 이날 전국 제로웨이스트가게 연대 모임 ‘도모도모’와 서울환경연합이 공개한 ‘지방자치단체별 종이팩 선별 수거 현황 시민조사’에 따르면, 멸균팩을 재활용하지 않고 폐기하거나 상황을 모른다고 응답한 지자체가 전체 지자체 중 절반 이상(55%)이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
이날 시청 앞 모임은 통상의 행사와는 사뭇 달랐다. 이날 마이크를 든 이들은 전국 제로웨이스트 가게 주인들. 평범한 시민들이다. 마이크를 잡은 손, 흘러나오는 목소리엔 어색함까지 엿보였다. 그만큼 더 진심이다. 그들의 얘기는 날 것의 일상과 고민이었다
인근 유치원에서 우유팩을 정성스레 모아왔어요.
‘아이들과 열심히 모았는데,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못 찾았다’며, 제로웨이스트 가게에서 받아줘서 고맙다고까지 했습니다.
제로웨이스트 바람가게 대표
이날 전시된 3000여개의 종이팩 트리는 이들이 만든 게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하나씩 모였다. 종이팩 재활용을 실천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직접 자르고 붙이며 꾸민 종이팩 트리들이다.
이들은 ▷공동주택 종이팩 전용 수거함 설치 의무화 ▷재활용 선별장 내 종이팩 의무 선별 지침 마련 ▷종이팩 재활용 의무율 상향 조정 ▷EPR 개선에 따른 재활용 체계 구축 등을 주장했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수거된 종이팩을 우유팩과 멸균팩으로 선별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고 투명 페트병처럼 종이팩 배출을 의무화한다면 수거 물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환경부도 개선책을 검토하고 있다. 환경부는 현재 ‘종이팩 분리배출 시범사업’을 시행 중이다. 내년 2월부턴 전국 공동주택 100만 가구, 대량배출원 300곳을 대상으로 사업 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제도적으로 종이팩에서 우유팩과 멸균팩을 구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며, 시범사업을 거쳐 투명 페트병처럼 종이팩 역시 분리배출을 의무화할 수 있도록 관련 지침을 개정하는 방안도 계획 중”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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