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기후 난민, 해수면 상승, 생태계 붕괴 등 문제는 다음 세대, 몇십 년 뒤가 아니라 당장 직면한 문제잖아요. 2016년에 저는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해 제 권리를 행사하는 데 무리가 있었습니다”
1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 소통관에 선 김은찬(15) 군은 이같이 말했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개정안 발의를 알리는 자리에서 중학생이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토로하게 된 건 왜일까.
자본시장법 제159조에는 기업이 사업보고서에 의무적으로 기재해야 하는 항목들을 명시하고 있다. 회사의 목적과 상호, 주요 사업 내용부터 임원의 보수와 산정 기준 등이다. 투자에 필요한 정보를 법률로 정해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법이다.
기후변화와 관련해 어떤 사업을 하는지, 대응 현황과 계획은 무엇인지 등의 정보가 앞으로 기업들이 의무적으로 공시해야 할 만큼 중요해졌다는 게 은찬 군을 비롯한 시민 167명과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주장이다.
이들은 법 개정에 앞서 기후 공시를 의무화하지 않은 자본시장법이 국민들의 환경권과 생명권을 침해한다는 취지로 헌법소원을 지난 9월 청구했다. 그러나 약 2개월 만인 지난달 7일 헌법재판소는 ‘각하’ 판정을 내렸다. 각하란 소송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 내용에 대한 판단 없이 종결한다는 의미다.
헌법소원이 각하된 건 정해진 청구 기간을 준수하지 않아서다. 헌법소원은 기본권이 침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90일, 법이 시행된 날로부터 1년 내에 청구해야 한다. 자본시장법 제 159조의 경우에는 가장 최근 개정 및 시행됐던 2016년 6월 30일로부터 1년 이내에 헌법소원을 청구했어야 한다는 게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다.
기후 공시를 의무화하지 않은 자본시장법이 환경권과 생명권, 재산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지 다퉈보지도 못한 채 소송이 마무리되면서 “아쉽고 실망스럽다”다는 반응이 나오게 됐다.
은찬 군은 “중학교 3학년인 저는 2016년 당시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해 제 권리를 행사하는 데 무리가 있었다”며 “각하 이유를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노력이 쉽지 않다는 걸 반증하는 사례”고 지적했다.
또다른 청구인인 환경 강사 이정민(47) 씨도 “기업의 녹색 성장을 위해서 탄소중립 친화적인 재정을 운용하고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국가적 목표는 이를 보장할 적극적 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한 국민으로서 기후 관련 중대 위험과 기회를 판단할 수 있는 공시 의무화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아쉬운 건 기후 공시 관련 헌법소원을 되돌려 보내서만은 아니다. 이외에도 기후 관련 헌법 소원은 20220년부터 5건 쌓여있는데, 아직 결론이 난 사건이 없는 상황이다.
반면 해외에서는 기후위기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환경단체 우르헨다와 시민 886명이 제기한 민사 소송에 법원은 2019년 정부에 이산화탄소 감축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를 정한 법에 지난해 일부 위헌 결정을 내렸다. 미국에서도 지난 8월 몬태나주 정부가 깨끗한 환경에서 살 헌법 상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다.
이에 대해 양연호 그린피스 기후에너지 활동가는 “전대미문의 기후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사법부는 여전히 과거의 시각과 법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며 “헌법재판소는 요구되는 시대적인 요청에 책임감 있는 자세로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헌법소원 법률 대리인인 이영주 법무법인 원 변호사는 “기후 공시는 거스를 수 없는 국제적 흐름”이라며 “국민의 환경권과 생명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법에 근거를 둬야 한다. 이같은 원칙이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선언되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이날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온실가스 배출량 및 감축 목표를 공개하고, 의사 결정 구조를 사업보고서에 의무 기재하는 걸 골자로 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기후 대응 계획 등은 3년마다, 이행 현황은 매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표결 대상 안건으로 상정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김성주 의원은 “금융위에서 의무 공시 시기를 2026년 이후로 연기했다. 이는 세계적 흐름에 역행하는 처사이자 탄소중립을 기준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 중인 산업 변화와도 엇나가는 결정”이라며 “현재 가장 시급한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려면 기업의 대응 역량 정보를 법정 공시하도록 하고, 거짓 공시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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